이달의 책

‘부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성진환, 오지은)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수카)

임소망(시민참여자)

 

식구(食口)란 그 이름대로 풀이하자면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지칭한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전체가 매일 식사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집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맞벌이 가구가 주된 요즘엔 저녁이라도 업무로 인해 퇴근이 늦어진다면 상황을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식사 준비라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재료를 구매하고 관리하는 일부터 식사 후 설거지까지 생각한다면 꽤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 업무에 지친 현대인이 매일 수행하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재택에서 근무하는 프리랜서 부부라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에는 “규칙적으로 같이 식사하는 루틴을 만들고 싶은데 쉽지 않은” 두 명의 음악가와 한 마리 개,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로 이루어진 가족의 이야기이다. 만약 어떤 동화가 ‘…그리고 두 사람은 4년 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면 그 누구도 해피엔딩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각각 ‘예술가’라면 어떨까.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관을 자원으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일이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흔히 프랑스 영화 같은 장렬한 파국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다행히 결혼 7년째에 접어든 이 부부의 세계는 “어떻게 우리가 같이 있지?”라는 질문 아래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의 손을 잡고 같이 입장을 해서 우리가 좋아하는 신부님의 주례를 들었다. 신부님은 가수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민망하다고 하시더니 노래를 거나하게 하셨다. 그리고 각자의 다짐을 읽게 하셨다. 내 다짐은 그냥 평범한 얘기였지만 그는 조금 특이한 다짐을 했다. 결혼으로 그녀의 예술성을 해치지 않게 하겠다는 것.

삶이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라면 가족이란 나와 타자의 투쟁이 일어나는 첫 번째 장이자 가장 바쁘고 가장 작은 단위의 경기장이 아닐까. 그중에서도 ‘부부’가 탄생하는 단계는 눈여겨볼 만하다. 최근 종영한 한 드라마에서는 부부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어 서로의 인생을 섞어 공유하는” 단계라고 진단한다. 게다가 정말 신기하게도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부부하다’라는 형용사가 존재하는데, 이는 ‘눈이나 비가 한창 쏟아지는 모양새’를 뜻하는 말로 아마 우리 조상들 역시 부부라는 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의 고난을 잘 알고 있던 듯하다.

인생의 대소사 중 하나인 혼례(특히, 부모와의 정서적 분리가 어려운 한국에서는 더욱)는 투쟁의 정점에 다다르는 국면이다. “홍대 마녀”라고 불리던 저자 역시 실상 부모님의 행사인 “K-결혼문화” 앞에서는 결혼식을 하기로 승낙한 순간부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혼 당일에 “머리를 풀고 레드 립스틱을 바르고 닥터마틴 워커를 신는 것”이 유일하게 자신다운 부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릴 적부터 살아온 부모나 형제와도 다투는 것이 일상인데 여태까지 전혀 다르게 살아온 타인과 밥 먹는 시간, 화장실을 청소하는 방법 따위의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는 공간과 시간을, 삶을 공유하는 것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이는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충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어쩌면 이 치열한 공방은 우리 유전자에 깊숙이 각인된 본능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햄스터를 떠올려 보자, 작고 귀여운 이 설치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동족을 잡아먹는 잔인한 생물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동물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독일에서는 애완 햄스터 한 마리의 사육에 필요한 면적을 최소 1000㎠로 권장하고 있다. 이는 햄스터라는 종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그 작은 포유류에게 왜 그렇게 큰 사육장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야생 햄스터의 생활 반경은 하루에 대략 2km에서 5km 정도 되기 때문이다. 햄스터가 그러할진대 그 육신과 자아의 크기가 몇십 배는 되는 사람은 어떨까? 영역본능을 가진 동물에게 공간(혹은 특정 자원)의 모자람은 필연적으로 투쟁을 유발하므로 부부의 세계가 지속되려면 어떤 굴종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주 작은 생명이라도 생명은 생명이라 새로운 룸메이트가 생긴 거나 다름없어 밸런스를 새로 잡아야 했다. 이제 우리는 둘이 아니고 셋인 것이다.

사실, 내 세계에서 나는 항상 정당하므로,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하물며 그 상대가 말이 통하지 않는 강아지라면 어떨까? 아주 어린 강아지가 공복토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부부 역시 서로의 기호 체계를 읽어낼 방법이 부재한 까닭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나 ‘흑당이’를 받아들이며 이 부부의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흑당이의 입질에 아끼는 그림책을, 흑당이의 실외 배변 때문에 아침잠을 포기했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허물고 다시 구축하는 과정은 내가 나로 쌓아 올린 것들을 직접 무너뜨리는 일이다. 우리는 그에 두려움과 분노를 느낄 수 있으며 또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좌절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길이 항상 그렇게 나쁘기만 할까?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처럼 수 없는 파괴 끝에 태어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누군가와 함께 “조금 불편하고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 싫은 걸 줄여나가는 일이 자아의 상실이 아니라 성장이 될 수도 있다면,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맞이하는 내일이 어제보다 행복하다면, 두 사람의(혹은 그 이상의 구성원) 세계가 새로 태어나는 순간을 그려보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임소망

차별없이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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