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완벽’보다 어려운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민음사, 2009)>

 

임솔이(시민참여자)

아마 ‘완벽’하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 두 음절만으로 경탄에 가까운 흠모와 찬사를 아우르는 단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그런 ‘완벽’한 집사를 다룬 이야기로, 1956년 여름 잠시 저택을 떠나게 된 집사의 여행기이자 동시에 그가 지나온 삶을 여로를 되짚어가는 소설이다. 주인공 제임스 스티븐슨은 그야말로 ‘완벽한’ 집사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35년간 저명한 귀족 가문인 달링턴 가문의 집사로서 저택을 관리하고 주인을 보좌하는 업무를 빈틈없이 수행했다. 사용인들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엄격한 기준은 자기 자신에게도 예외가 없어서, 달링턴 홀의 은 식기는 늘 얼룩 하나 없이 광택을 유지하고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달링턴 홀의 모든 창에는 먼지 가리개 한 장도 씌워져 있지 않다. 저택은 잘 관리되어 있고, 대접은 융숭하니 저택을 방문한 모든 손님은 달링턴 홀의 우수한 집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완벽한 집사가 충정으로 모시는 달린텅 경은 온화한 성품에 혼란한 조국 걱정에 잠 못 이루는 그야말로 “신사 중의 신사”라는 평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니, 이 두 콤비는 안정적인 구도를 착실히 따르는 ‘완벽한’ 그림인 셈이다.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춘 집사라면 완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의 역할 속에 사는모습을 보여 주어야 마땅하다. 자신의 역할이 무슨 판토마임 의상이라도 되는 양, 아무 때고 벗어 던졌다가 다시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티븐슨의 직업정신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장인과도 같다. 그는 세계라는 큰 무대에서 활약하는 달링턴 경을 뒤에서 보좌하고 모실 수 있음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며 이를 평생의 소임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켄턴 양에 대한 연민이나 아버지의 죽음은 ‘집사’로서 자신을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 묻어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고할 정도의 일념은 집착과도 같아서 때로는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달링턴 경은 1930년대 유럽의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기에, 흔쾌히 자신의 저택을 국제적 인사들의 비공식 회담의 장소로 제공했다. 그러나 순수한 선의로 시작한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달링턴 경은 나치의 사상에 동화되었고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하녀들을 해고할 것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주인의 말에 따르는 것이 집사의 미덕이라고 생각했기에 스티븐슨은 마치 “식료품 주문 목록을 논하듯” 루스와 사라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제 기억으로 당신은 루스와 사라를 내보내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고 온당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셨어요. 분명히 반기시는 것 같았다고요.”

켄턴 양, 그럴 리가 있겠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온당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한 거요. 사실 그 일로 나도 걱정이 많았어요. 솔직히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소. 그런 일은 정말, 이 집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오.”

그렇다면 스티븐스 씨, 왜 그런 얘기를 그때 저한테 하지 않았어요?”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대꾸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그럴듯한 말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켄턴 양이 먼저 바느질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티븐스 씨, 당신이 그런 생각을 작년에 털어놓았다면 저한테 얼마나 힘이 되었을지 알기나 하세요? 제 수하 처녀들이 해고되었을 때 제가 얼마나 심란했는지 뻔히 알고 계셨잖아요. 당신이 한마디만 해 주었어도 큰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말해 보세요, 스티븐스 씨, 당신은 왜, , 왜 항상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살아야 하죠?”

종전 후, 달링턴 경은 나치로 지탄받아 불명예스럽고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달링턴 경 사후, 스티븐슨은 달링턴 가문이 200년 넘게 소유해 왔던 저택과 함께 미국인 갑부 패러데이에게 ‘영국식 서비스 제공자’라는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써 함께 ‘양도’된다. 달링턴 경은 ‘전통적인 신사’ 그 자체였지만 사태에 대한 대응은 그저 “아마추어 수준”에 그쳤으며 결국 모든 것은 “안쓰러운 헛수고”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자신은 그저 능력 닿는 데까지 성실히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며 그러한 자신에게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길 강요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스티븐슨은 몰랐을까? 아니다. 이는 하녀들을 해고한 뒤에 켄턴과 나눈 대화에서 확실히 나타난다. 게다가 그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달링턴 경을 모셔왔다는 것을 “시치미를 떼고” 본인이 왜 그렇게 했는지 끝없이 자문하며 이유를 찾는다. 이러한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스티븐슨은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판단을 위임하고 사고를 회피한 결과로써 진심으로 아끼고 섬겼던 주인의 비참한 최후에 일부분 기여한 셈이다.

여행의 막바지에서, 그는 20여 년 만에 켄턴과 재회한다. 스티븐슨은 그녀가 하녀장의 자리를 맡아주길 바라지만 켄턴은 남편에 대한 애정과 곧 태어날 손자를 이야기하며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는 대답을 전한다. 스티븐스는 켄턴 양이 아닌, 벤 부인으로서 그녀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헤어진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스티븐슨은 쓸쓸하게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후련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완벽한 사람보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집이 세지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일 인분의 경험이 그 사람의 가장 확실한 근거로 자리 잡기 때문일 것이다. 집사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옛사랑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과거는 분명 아름다웠으나 시간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변화를 인정하고 다시금 시작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분명 그에게는 앞으로 남아 있는 나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길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려는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찬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비록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겠지만 조그만 변화를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임솔이

좋은 날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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