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끝을 거슬러 올라가다

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

박송완 (시민참여자)

 

불명확보다는 명료함을 원하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제일의 가치는 ‘용건만 간단하게’ 라는 말이 아닐까. 한동안 문학을 멀리했었던 나 역시 그런 간단함과 명료함이 훨씬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차분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요점을 찾기에 급급했다. 삭막하지 않은가? 공감을 바라는 누군가에게 ‘그래서 요점이 뭔데?’ 라고 물어보라. 물론 핵심적인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끔은 누가 건네는 의미 없는 말 한 마디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작가 김훈이 가져온 새로운 이야기가 내게는 딱 그러했다. 누군가가 던지는 가벼운 농담처럼 그의 글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보다는 간만에 접하는 이런 이야기가 영 낯설게 느껴졌기에 단번에 집고 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학창 시절 보았던 그의 글과 이름이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기에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봤다. 하지만 이에 앞서 내게 문학이란 그리 큰 울림을 주는 글은 아니었음을 밝힌다. 감성이 충만했던 사춘기 시절에도 그러했고, 마냥 어리지 않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저 수준 낮은 어휘력 탓에 글 자체를 읽기가 어려운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서사가 납득이 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행동에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 읽고 난 뒤에는 물음표만 한 가득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자연스럽게 문학은 나와는 거리가 먼 영역이 되어버렸다. 책을 좋아했었지만, 흥미가 있었던 것은 복잡한 서사나 깊은 주제 의식이 담긴 글보다는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소비적인 글에 한층 더 흥미가 생겼었다. 하다못해 늘 풀었던 수능 기출 문제집의 문학 파트를 볼 때조차도 인물들의 동기나 이야기 자체를 분석하기에 바빴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살필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내 낮은 언어 영역 점수의 패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 읽었던 작가 김훈의 글은 그런 글들 중에서도 꽤 유별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즐겨 읽었던 가벼운 장르 문학에 비해서는 한없이 무거운 글과 흐름이었지만,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다만 아직 어린 내게 무르익은 중년 남성의 감성이 온전히 전달될 리는 없었다. 나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후로는 가벼운 글들보다도 객관적인 정보와 흥미로운 가설들을 제시하는 글을 가까이 하게 됐다. 핑계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을 울리는 명문보다는 머리에 입력되는 삭막한 문장을 선호하게 된 것도 이런 독서 습관 때문은 아니었나 싶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글을 거의 10여년 만에 다시 마주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꽤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전에 받았던 깊은 인상 때문인지 제법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하지만 이전번에 받았던 느낌과는 또 다른 감상을 들게 했다. 작가 특유의 묵직함은 여전했지만, 그는 담담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표현으로 단어와 단어를 매끄럽게 이어갔다. 책의 표지에서, 그가 호언처럼 밝혔던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없다’ 는 그 말이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후에야 읽는 이를 향한 선전포고였음을 깨달았다.

그 잘 써진 글로 풀어내는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아니, 단순히 ‘흥미롭다’ 라는 말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가 새로이 써낸 세계는 지금으로부터 훨씬 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과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현실로부터 비롯되었으나 현실은 아닌 그런 세계에서 세상은 야만과 문명이라는 두 영역 밖에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양립은 있을 수 없으며, 어느 하나가 무너지기 전까지 그들이 쌓아올린 분쟁의 역사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을 어렵지 않게 예감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어디에나 있는 흔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의 시선은 인간만이 아닌 그들과 공생하는 말(馬)에게 머물러 있다. 실상 글에 큰 파문을 형성하는 건 사람의 몫이지만, 이 안에서 나타난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는 오롯이 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화자는 역사가의 눈으로 파편화 된 에피소드를 한 곳에 묶어 두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투나 태도에서 읽히는 담담함은 필요 이상으로 냉정하지는 않지만, 건조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거슬림이 없고 매끄럽게 읽힌다. 또한, 그것이 글 안에서 읽히는 말들의 생명력을 부각시키는 장치가 되는 듯하다.

분명 그가 전하려는 메세지는 마냥 가볍지 않다. 그러나 부산스럽게 이것만을 곧장 강조하지 않는다. 생명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것에 대한 예찬이 작가 특유의 담백한 어조로 비쳐질 뿐이다. 누구 하나 이를 중하다고 소리 높여 외치지 않지만, 그러다 보니 별 스스럼없이 그 예찬에 동조할 수 있게 만든다. 어설프게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 하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이야기가 막바지로 다다를 때쯤 독자는 초원을 달리며 물을 마시는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응당 가져야 할 존귀함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만물이나 가지는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한 것’ 에 충실할 뿐이다. 말은 달려야 자연스러운 것이고, 목이 마르면 당연히 물을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말은 달린다. 야만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큰 강물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이 네발 달린 짐승은 그 강물의 반대편을 향해 뛰어간다. 시원(始原)을 향해 가는 그 여정은 짧으나 이를 지켜보는 독자는 하나의 단어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표지에 밝혀 놓은 작가의 포부, 작가의 선전포고가 그토록 적실한 말임을 그 순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혹평할지도 모르겠지만,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만들고 이로써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얼마나 큰 노고를 필요로 하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게다가 그것이 그저 노력만으로 성사되는 것도 아님을 잘 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감상은 찬사에 가깝다. 냉엄하게 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역량도 되지 않고, 그러기엔 내가 이 이야기에 너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책장을 닫고서 큰 울림을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고 싶지도 않다. 그저 담담하고 먹먹하게 그 끝이 읽혔으므로, 누군가가 건넨 가벼운 농담을 들었을 때처럼 슬그머니 미소 지은 채로 이 책을 기억하고 싶다.

 

박송완

30대임을 부정하고 싶지만, 이제 생물학적으로도 서른이라는 걸 깨닫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끼니 떼우기가 귀찮아 하루에 한끼만 먹어도 되는 방법을 궁리 중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서 즉석밥으로 연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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