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상(시민참여자)
나는 차별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를 차별해서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차별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의 뒤에 있는 소개문을 읽었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고 당황하기도 했다.
“내가 원래 결정 장애가 심해서”
“요즘 얼굴이 너무 타서 동남아 사람 같아”
처음에는 여기의 어디가 차별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말은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하는 말이기도 했고, 친구들을 놀려댈 때 몇 번이나 썼던 말이었기 때문에 왜 이런 말을 예시로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다”
“흑인・동양인은 출입 불가”
왜냐하면 이런 말들처럼 누군가를 인종이나 종교 등으로 겁박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책을 펼치자 작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결정 장애’라는 단어를 듣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밥을 먹거나 카페에 가면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고민하다 한참을 보내는 친구들을 보면 나도 놀려댔으니까.
그러나 내가 생각 없이 장난처럼 웃으며 놀려대는 말들은 장애인들에게 큰 상처가 되고 있었다. 장애인들은 ‘결정 장애’ 라는 단어에 섞여있는 부족함과 열등함, 그리고 멸시가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한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도 크게 다가와서 한참이나 책을 넘기지 못했다.
내가 차별을 하고 있었다니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인데 장애인을 차별하고 있었다니.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말하는 선량한 차별 주의자가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외국인 차별과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차별이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나오는 세상에서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회사에는 외국인 직원도 있고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는 많은 사람이 계약직이기 때문에 나는 나 나름대로 차별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차별을 하고 있었다니.
어째서 작가가 책의 제목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차별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이 나는 아닐 거라고 내가 하는 말은 차별과 혐오가 아닐 거라고 툭툭 내뱉고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는 지금 하는 말이 차별이라는 인식도 없고 혐오라는 생각도 없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다들 하니까 나도 따라했을 뿐 악의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선량한 차별 주의자들인지.
특히 한국 사람들은 갈등을 싫어한다. 좋은 게 좋다고 모나지 않고 나와 조금 다르다 하더라도 하하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차별하지 말라”든가 “그런 식으로 표현하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면 “산통 깬다” 혹은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흑인 분장을 하고 웃음을 유도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는 내용에 서양인들이 눈을 찢고 피부를 노란색으로 분장하는 일들이 떠올랐다. 그건 차별이고 우리가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닐까?
비하할 의도가 아니라 재미를 위해 한 것이라고 말하면 모든 게 이해되는 걸까?
그러나 내가 비하할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약 장애인이고 흑인이고 제 3국의 국민이었다면 사람들은 내 앞에서 내 피부색과 출신과 핸디캡을 가지고 농담을 할 수 있을까?
우스갯소리로 한 ‘결정 장애’가 장애인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인 것처럼 내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이기상
전형적인 공돌이 루트를 탄 화학공학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