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영(시민참여자)
20대 초반까지도 ‘엄마’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는 마음이 솟아나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엄마와의 관계를 고민한 만큼 엄마도 고민했는지, 엄마는 나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궁금했다. 성인이 되어 전쟁이 시작됐다. 듣고 싶었던 말들을 위해 때로는 엄마를 공격하고, 회유하고, 애걸했다.
사실 우리 엄마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부족함 없이 날 키워냈다. 그럼에도 나는 늘 엄마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엄마는 어린 첫째 딸이 알아도 되지 않았을 너무 많은 어른들의 일을 전달했다. 감당하기 힘든 줄도 모르고 엄마의 감정을 어린 내가 모두 삼켜버렸다. 이렇게나 힘든 삶을 견디고 있는 엄마를 내가 더 힘들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가장 안전함을 느껴야 했을 사람에게서 늘 불안을 느꼈다. 나는 엄마에게 사소한 힘든 감정도 털어놓지 못하게 됐다.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것, 내 감정을 잘 살피지 못하는 것들 것 모두 엄마로부터 기인한 것 같았다.
성인이 되어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양육자가 그러면 안 됐다. 엄마도 날 키우면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관련 직업을 찾았기 때문에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에게 사과를 듣고 싶었다. 엄마도 어렸고, 힘든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전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내 기대를 산산이 부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엄마는 변명했고 나를 공격하고 힐난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네가 힘든 것을 말하지 않았잖아, 나는 몰랐어.’ 시간을 두고 계속 엄마와 싸웠고, 공격과 방어가 팽팽하게 겨룬 후 마지못한 사과의 패턴이 반복됐다. 학업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에야 “겨우 엄마만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구원의 희망을 놓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스베나 플라스 펠러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그의 엄마는 그와 동생이 아주 어린 나이에 떠났다. 여러 명의 새아버지가 생긴 이후에도 그의 엄마는 어떤 이유도 참회의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엄마의 한탄 한마디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삶의 시간만큼 존재와 관계를 고민하게 했던 것처럼, 그도 엄마가 떠난 이후로 용서와 죄를 계속해서 캐물었다.
<조금 불편한 용서>는 그 결과물이다. 그는 용서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 용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추적하길 시도한다. 이 책은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사랑한다는 뜻일까, 망각한다는 뜻일까”라는 세 가지 질문을 기둥 삼고 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자크 데리다와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자를 소환한다. 한나 아렌트는 용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한다. 또한 용서의 가능성은 죄인의 참회가 조건이다. 저자는 진실한 참회를 구분할 수 있을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충분한지에 대해 다시 질문한다. 자크 데리다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대답한다. 저자는 결국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무조건적이며, 따라서 모든 합리성, 모든 이해 가능성의 저 너머에서 일어난다”는 문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항해를 보여준다.
이 책은 수많은 자기계발서와는 달리 성공적인 용서의 길을 걷지 않는다. 그보다는 계속해 용서에 대해 질문한다.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차라리 사랑하는 것으로 덮으려고, 엄마가 나에게 한 것들을 잊으려고 노력하기까지 하며 분투했을 저자의 개인적인 고민은 ‘용서’라는 맥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같은 시대 고민까지 담게 된다. 개인들의 구체적 상황과 역사적 관계를 통해 용서의 실마리를 탐색한 책을 읽은 지금, 엄마를 용서했냐고 물을 수 있겠다. 더 이상 용서는 궁극적인 도달점이 아니다. 계속되는 고민과 화해와 결정이 함께 할 뿐이다.
김란영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