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보는 역사
<이순구, 조선의 가족 천개의 표정(너머북스)>
오수연(시민참여자)
이미 사라진 나라이건만, 조선은 우리에게 참 멀고도 가깝다. 전국을 여덟 개 도로 나눈 태종의 행정 구역 분류는 오늘날에도 각 지방의 문화적 특색이나 정서적인 소속감을 구분하는데 유효하다. 물론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겠으나 매년 실시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시대별로 가장 많은 출제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가 바로 조선이라는 점만 언급해도 한국인들에게 있어 그 중요함이 어느 정도인지 설명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다.
조선의 건국은 단순히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국가 기반을 완전히 새롭게 조성하려는 시도였다. 1392년 이성계를 주축으로 하는 신진사대부 세력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위화도에서의 회군으로 실권을 획득한 이들은 불교를 기반으로 삼았던 고려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당시 유교는 선진국이라 여겨지던 중국에서 도입된 첨단 문물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점차 사회 전반에 걸쳐 크게 확산되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이 수립되고 이것이 사회 전반의 보편적인 윤리로 작용하면서 조선은 번영과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저자는 이 과정 속의 ‘가족’의 역할에 주목한다. 조선에서는 부부가 중시되고 교육·복지와 같은 사회 운영의 일정 부분이 ‘가족’에게 일임되었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국가는 없고 집안만 있을 정도였다.”라는 저자의 말은 세도 정치가 횡행하던 19세기 전반의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문이 출세하거나 혹은 가문째로 축출되거나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니 조선 시대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 예로 김종직을 들 수 있다. 조선 초기 사림파 김종직은 부인 조 씨가 죽은 지 3년 만인 쉰다섯 살에 열여덟 살의 두 번째 부인과 재혼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에 이는 집안이 몰락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얽혀있다. 1485년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재가하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서얼의 자손들은 과거를 볼 수 없다는 법이 명시되어 있었다. 김종직의 재혼이 이루어질 당시에 그에게는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없었다. 과거를 볼 수 없는 양반 남자는 관직에도 오르지 못한다. 벼슬길에 오를 수 없다면 가문은 번성할 수 없다. 게다가 양자 제도 역시 확실히 자리 잡지 못했다. 양자를 들일 수 없다면 양반 여성과 혼인을 해야 하는데, 양반 여성들의 재혼이 엄격히 금지되었기에 김종직과 동년배이면서 초혼인 양반 여성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듯 김종직의 재혼은 그를 위시하여 이루어진 가문의 생존전략이었던 셈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절대 망하지 않는 드라마 소재 중 하나가 입시(자녀의 입시를 둘러싼 경쟁과 이로 인해 파생되는 비리)라는데 어쩌면 이러한 과거 때문에 우리가 소위 말하는 막장 입시 드라마에 열광한다고 생각하면 꽤 재밌다. 이렇게 가족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매개 삼아 구조적인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 가문의 안녕 등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욕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역사는 살아있고 사람은 살아간다.
오수연
인문학을 공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