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말의 힘을 믿으세요?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타인의 사유)>

송승범(시민참여자)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내 친구 K는 국어국문과 학생답게 언어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흰 종이에 가지런히 쓰인 필체는 흰 건반 사이 단정히 놓인 검은 건반 같았다. 또한 일상적인 대화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시나 노래 가사 한두 줄 정도를 자연스레 인용할 줄 아는 낭만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애가 늘 공중파 교양 프로그램 같은 문장을 출력해내는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나이 또래답게 유행어 사용에 몹시 능했고 또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제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욕설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토록 다채로운 언어를 사용했던 K가 인상에 깊이 남은 까닭이 있다. 그 애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 나쁜 말은 하지 않았다.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만다고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혹은 발명을 고르라고 하면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것을 고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언어가 없었다면 그 찬란한 순간들은 공유되거나 쌓이지 못한 채 다시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언어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은 것이 바로 일본의 ‘언령’이다. 숫자 4와 죽을 사의 발음이 같아 병원과 같은 공공시설에서 사용을 지양하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뭐 이런 걸 다 신경 쓰냐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 앞에서 ‘미끄러지다’라거나 ‘떨어지다’는 말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가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지표라면 나날이 발전해가는 매체 산업과 그 익명성 아래, 더 나쁜 말을 내뱉는 것이 스포츠가 되고 돈벌이가 되는 요즘엔 차라리 근거 없는 미신이라 해도 말에 깃든 힘을 믿는 쪽이 더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야 입으로 배설하는 것보다는 듣는 이의 상황과 기분에 맞춰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개인과 사회를,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장치이고 이를 사용하면서 더 신중한 사람이 되자고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는 책이었다.

 

송승범

꿈뻑꿈뻑 소 눈을 가진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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