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명 아이돌그룹이 신곡을 발표하며 내놓은 뮤직비디오가 노래나 작품성이 아닌 사회적 이슈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에 몸에 밀착되는 짧은 치마유니폼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모습의 간호사가 등장한 것을 두고 ‘현실의 간호사 모습과 다르다, 간호사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고 성적 대상화를 부추긴다’는 의견과 ‘예술적 표현에 대한 지나친 검열이다’라는 의견이 기사마다 댓글 전쟁으로 번졌다. 해당 아이돌의 인기와 기획사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과 파급력이 적지 않았고 이슈는 젠더와 폭력이었다.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기획사는 ‘작품의 의도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우려 된다’고 했고, 간호사(보건의료노조)들은 ‘간호사라는 전문 직업군에 대한 인식의 왜곡’을 우려했다. 기획사의 설명대로 가사에 충실하게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의료진’이 꼭 현실의 간호복을 입고 등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가사에 충실한 연출이라면 인물은 명백히 간호사이며 그 간호사가 짧고 타이트한 치마, 짙은 화장, 하이힐 등으로 상징되는 성적 대상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 보인다.
사건은 보건의료노조의 성명과 그 요구를 수용한 기획사의 결정으로 종지부를 찍었지만 논란은 남았다. 간호사나 승무원이 현실의 모습과 다르게 지나치게 성적 대상화되어 매체에 등장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강산이 몇 번씩 변하도록 타이트한 유니폼의 간호사가 반복적으로 매체에 등장하는 일이 여전히 직장에서 성폭력 피해에 노출되는 위험성이 높은 직군으로 간호사가 꼽힌다는 사실, 일상의 간호 현장에서 간호사들이 갑질과 희롱, 추행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할 수 있을까?
해당 뮤직비디오의 문제가 되는 장면이 공개되자마자 간호사들끼리의 익명 SNS게시판(대나무숲)에는 ‘굉장히 불편하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봐야 하나, 한탄과 탄식이 나온다’는 호소가 쇄도했다는 소식이다.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서서 휴대폰 창을 들여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는 현실의 간호사를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진다. 이 탄식과 분노의 읊조림은,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이 성애화된 이미지에 번번히 갇히고 마는 무력감, 자신이 누군가의 성적 욕망과 분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협이 주는 불안, 또 누군가에게는 이미 간호 현장에서 숱하게 겪어왔던 크고 작은 폭력피해의 재경험이 주는 신호 일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치료실에서 만난 예비 간호사가 떠오른다. 간호학과를 다니며 공부가 고되기도 하고, 때로는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방황하는 시간이 길기도 했다. 힘들게 필수 과정을 이수했지만 병동으로의 임상실습은 왠지 두려웠다. 긴장되던 실습 첫날 이 예비간호사는 수간호사선생님과 병동의 선배 간호사들 앞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면서 간호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의료인이라는 전문 직종에 한 발 다가선 느낌에 전율을 느끼고 병동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에 자신이 기여할 수 있음에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상냥한 미소로 병실에 들어갔다가 ‘예쁜 아가씨가 왔다’며 엉덩이를 더듬는 남자 환자의 추행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다. 그 날 이후 이 예비간호사는 상냥했던 자신의 미소를 자책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의심하고 피해 상황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고통에 시달리다 다시 병동의 실습생으로 돌아가기까지 6개월여의 시간이 걸렸다.
특정 직군에 대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왜곡된 표현은 해당 직군의 종사자들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터부시와 성적으로 대상화된 표현들은 해당 여성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겪는 폭력의 피해에 어떤 방식으로든 일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폭력의 알고리즘에 일조하지 않으려면 일상에 만연한 차별이나 혐오를 알아차리고 이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필자는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코로나 시대의 초등학생을 돌보며 때때로 강의를 하고 글도 쓰고 심리학적 이론을 내세워 아동의 문제행동을 진단하거나 양육에 훈수 두는 일을 주로 하지만 필자의 본업, 요샛말로 직업적 ‘본캐(本+character)’는 성폭력 피해 아동 청소년 지원기관의 임상심리사이다. 성폭력 피해를 입고 찾아오는 아이들을 만나 피해 후유증상을 평가하고 치료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 필자의 직업을 묻는 사람들에게도 이처럼 대답하면 주로 돌아오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성폭력 피해 아이들이요?’라고 놀라거나, 미간을 찌푸린 채 슬픈 표정으로 ‘그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다니’와 같은 경외의 말들을 내뱉거나.
전자의 놀라는 반응은 ‘성폭력 피해 아이들이 있어요?’ 혹은 ‘아동 성폭력이 진짜 있어요?’와 같은 순진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폭력에 노출되고 있으며 여성과 아이들을 향한 다양한 혐오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혹은 모른 척 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방임과 방관, 부인(denial)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실제 성폭력 피해를 입은 많은 아이들은 자신이 피해를 처음 보고한 이들에게서 그 말이 사실인지 의심하는 첫 반응에 큰 상처를 입고 피해사실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서 자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 피해자에 대한 혹은 피해자를 만나는 치료자에 대한 공감어린 시선처럼 들리는 두 번째 유형의 반응 ‘그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다니’는 어떨까. 대학원 수업시간에 있던 일이다. ‘상담의 첫 회기에 내담자와의 관계 맺기’라는 주제로 의견을 나누는데 한 후배가 이야기한다.
“성폭력 피해자인 내담자를 만난다면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힘들 텐데 치료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큰 슬픔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공감할 수 있을까요?”
초보 상담자의 기술적 미숙함 등은 차치하고, 이 따뜻하고 성실한 심리학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그 자신 안의 ‘피해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여간해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말들은 오랫동안 피해자들로 하여금 피해 사실로부터의 수치심과 자책감을 강요하고 침묵을 유지하게 했다.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이루 말 할 수 있었던’ 용기 있는 피해자는 그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피해자다운’ 모습과 행동은 비단 피해 이후에 나타나는 모습에 국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성별이나 연령과 같은 인구학적 특징이나 개인의 성격적 특성 등은 때로 피해 사실 자체를 의심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모 대학원 내의 성폭력 사건을 보자. 교수들의 미흡한 대처와 학교 당국의 미진한 대응 등이 도마에 오르내리며 지난 2년여 사이 몇 차례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이다. 당시 공방 끝에 가해자의 무죄가 선고되자 학교 이미지실추를 탓하며 피해학생을 무고죄로 고발한 어느 교수의 고발문에는 ‘피해자가 사건이 발생하고 3개월이 넘은 시점에 신고한 점, 피해자가 원래부터 원우들과 술을 자주 마셨으며 가해자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 성격이 강하다는 점’ 등을 들어 사건 발생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내용이 담겼다. 법 꽤나 안다는 교수의 이러한 입장을 보고 있자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성폭력 대한 오해, 고정된 관념과 편견이 피해자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2차 가해가 될 수 있음을 보았다. ‘피해자다움’을 규정한 후 이를 공감하고 치유하겠다고 다짐했던 후배의 예처럼 선의(善意)는 2차 가해를 예방할 수 없다. 성폭력 사건을 대함에 있어 더 이상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면서 사건의 본질을 좀 더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성인지 감수성’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별간의 불균형을 이해하고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 일상생활 속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한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는 가해자 중심의 주장이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를 뜻한다. 수행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전 충남지사의 사례나 최근 보도되는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 스쿨미투사건에서와 같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성폭력 사건들에서 가해자 무죄의 원심을 뒤집고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자주 인용되는 근거가 이 성인지 감수성이다.
한 여자 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에 의한 신체추행 사건이 발생하였다. 애초에 피해를 호소했던 학생들은 열 네 명이었으나 정작 수사과정에 적극적으로 응한 학생은 두 명에 그쳤다. 이 사실은 원심에서 판사로 하여금 사건을 가벼이 여겨 무죄를 선고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2심에서는 해석이 달랐다. 다수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하지 못한 것을 두고 ‘피해 여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스승인 피고인으로부터 당한 피해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학교내외의 부정적인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와 정신적 피해,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했고, 수사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없었던 12명도 사건 피해에서 간과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수평적일 수 없는 관계에서 가해자의 주장이 객관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재구성하고 맥락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더해져야 사건의 양면,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상대 성별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한다는 기본적인 원리에서 성인지 감수성은 공감능력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입장을 동등한 무게로 다루고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을 통해 이해받는 경험이 중요하다. 아이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방법으로는 그래서 부모가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것 만큼 좋은 것이 없다.
성인지 감수성의 또 다른 필요요소, 차별적 성문화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성과 젠더, 차별과 차이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야한다. 남성과 여성을 생물학적으로 구성하는 성(sex)과 달리 젠더(gender)는 남성성과 여성성과 같이 성역할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 사회적인 의미의 성을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 때문에 생겨난 구분이 성차이라면, 이 성차이로 인해 여성과 남성에 대해 생기는 편견, 이 편견으로 발생하는 차별이 성차별이다. 사춘기 이후의 남성과 여성은 신체조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차가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 남성이 더 근력이 잘 발달한다. 체력조건을 선발기준으로 삼는 채용과정에서 남자 응시자와 여자 응시자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이 생물학적인 신체조건인 성차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확실히 남자들이 원래부터 근성이 있고 성실한데 여자들은 원래 나약하고 끈기가 없어’라고 한다면 이는 성차별이 되겠다.
일상에 만연해있는 성차별적 언행이나 성별 고정관념, 나아가 성별과 성역할 뿐 아니라 곳곳에 숨어 있는 차별이나 혐오의 요소를 감지하고 잘 구별할 수 있는 레이더가 필요하다. 성별, 장애의 여부, 나이, 직업, 신체조건 등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차별지어지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찾아보고 불편한 표현이 있다면 고쳐 써야한다. ‘루저’, ‘안경뚱’과 같이 외모를 지적하거나 ‘눈뜬장님’ 같은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에 불편감을 느낄 수 있어야하며 불쾌함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차별에 동화되기는 쉽지만 저항은 어렵다. 저항을 위한 가장 첫 번째 과정은 내가 차별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늘어놓는 외모 지적질을 ‘그만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 사이에’, ‘웃으라고 한 말에’ 뭘 그렇게 정색 하냐고 한다면 따라서 웃어넘기지 말고, ‘그런 차별적인 표현에 나는 웃을 수 없다’고 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