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포럼

내가 만난 역사, 내게 남은 기억

 

들어가며

솔직히 말해야겠다.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명사가 생각나지 않은지는 오래되었다. 그때마다 스마트폰 검색 서비스의 도움을 받는다. 배우 유해진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그가 출연한 영화의 이름을 가까스로 떠올린 다음, 영화의 출연 배우를 검색해서 유해진이라는 이름을 찾는 식이다. 이렇게 돌고 도는 과정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누군가가 아는 체 하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나 대강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 한참 생각하는 일도 흔하다. 온라인의 각종 비밀번호를 맞추지 못해 다시 설정하는 일은 일상이다. 머리가 장식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서서히 치매를 맞고 있는 것 같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딱 한 번 스친 사람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해 당사자를 놀라게 하던 나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검색 서비스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검색 서비스에 길들여지고,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다보니 뇌가 과부하에 걸렸거나 퇴화해버린 건가 싶기도 하다. 날마다 너무 많은 음악과 뉴스와 정보를 들이다보니 그만큼 방류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떤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은 최근 기억부터 지워진다고 했던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특정 공간을 마주하거나 동일한 날짜를 맞이할 때마다 소나기처럼 엄습한다. 그 때 그 공간과 순간의 공기와 소리들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살아가는 한국인 시스젠더 남성이 간직하는 기억은 무수히 많다. 혼자 경험한 기억이기도 하고, 함께 경험한 기억이기도 하다. 일상의 기억이기도 하고, 역사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일상은 무수한 기억들이 교차하며 쌓인 지층이자 화석이다. 이미 완성되어 단단하게 굳어버린 화석이 아니다. 지금도 생성과 변화를 멈추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재의 삶에 따라 과거의 기억은 계속 의미와 울림을 바꾼다. 그때 몰랐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기도 하고, 그때는 알 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아무 것도 몰랐기도 하다.

1973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정규교육과정을 거친 서울 거주 시스젠더 글쟁이 남성을 관통하며 정체성을 만든 역사적 사건은 무엇일까. 내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만난 것처럼 느낀 순간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사건과 광주항쟁, 제 5공화국 출범, 아웅산 테러, 1987년 6월 항쟁, 1987년 대통령 선거 같은 사건들일 것이다. 아니다. 한동안 저녁 무렵이면 거리의 모든 사람을 멈춰 서게 한 국기 하강식일지 모른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극장에서 울려 퍼진 애국가와 그 때마다 일어서던 기억일 수도 있다. 각종 국제 경기에서 대한민국을 응원하던 기억도 나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 후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나를 스쳐갔다.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1997년 IMF 구제금융사태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 2020년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판데믹까지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는 과정은 나만의 판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뉴스매체와 책과 소셜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언급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되새겨야 한다. 그런 사건은 누구에게든 비중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한국 현대사를 다루는 영상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사건은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나와 별 관계가 없더라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 때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사건이 지닌 가치는 시간이 지난 후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들이 쏟아지고 겨루다가 특정 견해가 공식적인 견해로 인정받고 명명된다. 그 사건과 관련된 이들에게 마이크가 주어지고 권력을 갖게 되거나 사회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활동은 특정한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거나 역사적 평가를 다르게 부여하려는 쟁투인 경우가 많다. 419세대라든가, 6·3세대, 586 같은 단어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대상 자체가 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거친 사건들의 모음과 연결이지 않을까.

처음 만난 역사

생각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종신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 단위에 사는 미취학아동에게 대통령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 테지만 박정희가 비로소 나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은 그가 죽은 뒤였다. 갑자기 대통령이 죽었다고 하더니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를 볼 수 없어졌다. 하루 종일 암울한 음악과 함께 박정희의 생전 모습만 보여주는 텔레비전은 하염없이 지루했다. 대통령이 죽었다고 왜 마징가Z를 볼 수 없느냐고 물어봐도 뿔이 난 어린이의 짜증에 귀를 기울여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세상이 망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국민학교 1학년 반장이었던 나는 동네 파출소에 급조한 분향소에 가서 절을 했다. 당연히 혼자 자발적으로 갔을 리 없다. 분명 전교생이 다 가지 않았을까. 1학년 반 대표로 어설프게 향을 올릴 때는 왠지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느껴졌지만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TV에는 최규하라는 사람이 대통령이라 했다. 대통령이 이렇게 빨리 바뀔 수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처럼 등장했다. 1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대통령이 계속 바뀌니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말단경찰관이었던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나 선생님들 가운데 누구도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를 당황하게 했던 일들에 10·26 사건이나 12·12 쿠데타 같은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10여년이 지난 뒤였다.

내가 겪은 5·18

이상한 일은 계속 이어졌다. 박정희가 죽은 다음 해 봄 아버지는 갑자기 광주로 불려갔다. 광주에서 데모가 벌어져 막으러 가야 한다 했다.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광주에서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TV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머리를 싸매고 단칸방에 드러누웠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어머니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 그 때 나는 머리를 동여맨 수건을 갈아주는 방법조차 몰랐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광주에서 데모대가 왔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데모를 막으러 광주에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인데, 동네사람들은 광주에서 온 데모대를 맞이한다고 모두 신작로로 몰려갔다. 그 후 광주항쟁을 다룬 영상에서 너무 많이 보았던 장면이었다. 소형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 아마도 시민군이었을 이들이 광주에서 전라남도 곳곳으로 흩어져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 투쟁을 호소하기 위해 돌고 있던 순간이었다. 버스에 무어라 쓰여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전두환을 때려잡자 같은 구호를 써놓지 않았을까. 다만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의 빛나던 표정과 거의 모든 동네사람들이 다 몰려나와 박수를 쳐댔다는 사실만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버스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의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아버지는 곧 돌아오셨다. 지친 표정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바나나를 사가지고 왔는지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 나의 관심은 딱 그 정도였던 거다. 그리곤 나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국민학교 6학년 즈음 목소리를 낮춰 그 일을 이야기 한 친구가 있었다. 국군이 광주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세상 물정 하나도 몰랐던 나는 어떻게 배달의 기수에 나오는 국군이 사람을 죽일 수 있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세상을 많이 아는 것 같아보였던 친구는 코웃음 치며 나를 비웃었다.

친구의 말이 맞다는 걸 알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1987년 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전국을 돌며 5·18 사진전을 벌였다. 그 행사가 그거였는지 알게 된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때 알았던 건 목포 가톨릭 회관에서 5·18 사진전시회를 한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터넷도 없던 시절 그 소식을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아마도 먼저 다녀온 친구 누군가가 이야기해준 게 아니었을까. 가톨릭회관 건물 계단에 빼곡하게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내 앞쪽에는 중학교 국사 선생님인가도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줄은 느리게 움직였고, 나는 결국 그 사진들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보고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는 기억은 없다. 전시장에 어떤 사진이 걸려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곳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2년쯤 시간이 지난 후 광주사태 관련 청문회가 열리고 방송국에서 특집방송을 방영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탐독하기 시작한 인문사회과학 책들의 도움이 컸다. 광주의 외삼촌 집에 비밀스럽게 꽂혀 있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책을 몰래 읽은 것, 그리고 홍희담의 소설 <깃발>을 읽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렇게 나의 5·18 기억이 풍성해졌다.

그 후 대학에서 이런 저런 자료와 책을 읽으면서 광주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의 의도적인 양민학살일 뿐 아니라, 미국의 방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 즈음 뒤늦게 망월동 묘역에 순례를 갔을 때, 5·18은 완전히 살아있는 실체로 다가왔다. 허름한 묘지에 다닥다닥 붙은 무덤들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때부터는 전두환, 노태우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18이 공식적 평가와 법적 처벌 과정을 얻기 위해서는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투쟁에 밀려서야 전두환과 노태우는 16년 만에 법정에 섰다.

그 후의 역사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5·18은 공식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망월동에는 새로운 묘역이 생겼다. 2000년 즈음부터는 광주에서 5·18 행사를 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없었다. 정부에서 예산이 나왔고, 경찰이 행사를 보조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감옥에서 늙어 죽는 일이 벌어지지는 못했지만, 5·18 문제는 대부분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따금 이어진 5·18 관련 예술작품들과 끊임없는 사회적 논란은 역사와 기억에 대한 질문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학살과 저항, 주먹밥 공동체, 권력 찬탈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았는데, 여러 예술작품과 연구 서적들은 개개인의 삶에 스민 역사를 계속 살펴보지 않으면 역사와 기억이 얼마나 얄팍해질 수 있는지 아느냐며 끊임없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5·18은 상징이 된 몇 가지 이미지만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아니 요약할 수 없는 현재였다. 피해자이자 저항자로서 살아남은 이들 다수가 살아있었고, 그들이 감당한 상흔과 무게감은 책 몇 줄로 정리하기 불가능했다. 그들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5·18이 5·18의 전부가 아니었지만 그들의 기억과 심연에 귀 기울이지 않고는 실체에 다가설 수 없었다. 기억과 흔적은 곳곳에 다르게 존재했다. 우리는 5·18에 대해 모르는 게 더 많았다.

특히 5·18의 역사를 지우거나 변형하고 왜곡하려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기억은 격전의 현장이 되었다.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거나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광주와 5·18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인터넷에 흔했다. 구 전남도청을 다르게 활용하려는 움직임 또한 논란이 되었다. 그 때 사라진 사람들을 다 찾지 못했고, 발포명령을 한 사람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5·18의 진실을 흔들고 의미를 축소하려는 이들은 곳곳에서 출몰했다. 어떤 역사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나지 않았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벼락처럼 5·18을 만난 이후 40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에게 5·18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한국전쟁은 지나간 사건이었던 것처럼 5·18의 경험이 없는 세대들이 계속 태어났다. 그들에게는 5·18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방송과 책으로 만나는 5·18은 간접 경험일 뿐이었다. 기억은 강요할 수 없고 이식할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기억을 만드는 일도 불가능했다. 나도 1973년에 전라남도에서 태어났고, 1980년에 전라남도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기억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건 전적으로 우연이었고, 어쩌면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어느 정도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건, 너무나 큰 역사적 사건은 무게와 의미에 짓눌리기 마련이었다. 참고서의 공식을 외우듯 외우는 과정을 통해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에는 수학공식 같은 정답이 오히려 해가 되었다. 직간접적 경험이 없는 이들이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기억에 잠재한 정서적 울림을 공유하면서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억은 몇 월 몇 일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는 일만이 아니었다. 기억은 사실 관계를 잊지 않는 일이며, 그 때 느꼈던 감정의 울림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이기도 했다. 감정의 울림이야 말로 기억을 기억으로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잊더라도 감정은 앙금처럼 남았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분노이건 좌절이건 사건이 파생시킨 감정은 사실이라는 실체를 실질적으로 구성할 뿐 아니라, 그 실체를 기억할 이유가 되었다. 감정은 자신이 사건과 맺은 관계의 종합이었다.

그런데 5·18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사건과 맺은 감정의 교감이 없거나 약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계속 변화하기 마련이었고, 그에 따라 기억도 달라졌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섞이며 기억은 계속 새로워졌다. 당사자에게 이렇게 변화무쌍한 기억이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감정의 울림을 만들고 쌓을 기회를 주어야 했다. 5·18의 경우라면 학살에 대한 충격이든, 숭고함에 대한 감동이든, 목숨을 건 저항에 대한 경외이든, 자신만의 체험이든 새로운 감정의 기억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생생한 기억일지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 이어지지 못하는 기억은 역사가 될 수 없었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법적 처벌을 이뤄내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기억을 이전하고 계승하는 것, 새로운 이들에게 감정과 기억의 역사를 창출하는 숙제가 생겨났다. 강변하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강풀의 웹툰 「26년」이나 한강의 「소년이 온다」, 연극 <푸르른 날에>, <짬뽕>, <방탄철가방>, 영화 <스카우트>, <택시 운전사>, <오월愛>, <김군> 같은 작품이 계속 필요한 이유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만 계속 불러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너무나 감동적인 노래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이 노래가 무덤덤하게 아니 구태의연하고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기억을 잇기 위해서는 세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매개가 필요했다. 그 과정은 역사적 사건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공식화되는 평가와 상징의 가치와 의미만큼 계속 새로운 이야기와 상징을 만들어 교감하고 정형화 되지 않게 만드는 일을 병행해야 했다. 비슷한 의미라도 다른 이야기를 통해 전달될 수 있게 해야 하고, 현재의 시대 속에서 살아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진정한 계승이고 가치의 복원이며 기억의 지속이었다.

하지만 5·18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 뒤늦게라도 계속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사건은 많지 않았다. 워낙 많은 사건과 사고가 벌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주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을 다 기억하고 동의하며 공감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기억과 공감의 총량은 딱 정해진 양만큼이어서 한쪽으로 쏠리면 다른 쪽에는 소흘해지기 마련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 않는 사건, 별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사건, 시간이 흐르면서 더 풍부해지지 못하는 사건도 있다. 그 중 두 사건의 기억이 나에게는 여전히 묵직한 마음의 짐으로 쌓여 있다.

1991년 봄의 기억

하나는 1991년 5월의 기억이다. 그해 봄 명지대학교 신입생이었던 강경대가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전투경찰에 의해 맞아죽었다. 죽음은 강경대로 끝나지 않았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이정순, 김기설, 김철수, 정상순, 윤용하, 김귀정까지 열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고, 누군가는 시위 도중에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밀려 압사 당했다. 대학에 가면 꽤 많은 시위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한 학기가 다 가기도 전에 이렇게 많은 죽음을 만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문을 펼치기 두려웠고, 강의실에 들어가 웃을 수도 없었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대학 새내기의 찬란한 봄은 학교보다 거리에서 더 많이 펼쳐졌다. 지금처럼 문화제를 열어 평화롭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시위는 대학교 교문 앞의 최루탄과 화염병 공방이거나, 수원/안양/서울 등지에서 예고 없이 거리로 뛰어드는 가두투쟁이 대부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젊은 넋들이 지는 소식을 들으며, 거리에서 눈물을 떨구는 사이 봄이 지나갔다. 그래도 어쨌든 싸우다 보면 1987년처럼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데, 웬걸 그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었던 싸움은 왕년의 저항시인이 쓴 칼럼과 국무총리에게 쏟아 부은 계란과 밀가루 세례로 저물어버렸다. 물론 1991년 5월의 투쟁이 단지 그 사건들만으로 멈추었을 리 없다. 너무 많은 죽음이 이어지고, 거리 투쟁이 계속되다보니 운동권들도 지치고 시민들도 지쳤을지 모른다. 이 정도 일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도 거리에서 쫓겨나듯 학교로 돌아왔고 계속 다른 일로 바빴다.

그런데 기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매년 봄이 되면 그때 세상을 떠난 이들이 떠오르곤 했다. 나는 나이 들고 늙어 가는데 그들은 항상 그대로였다. 나의 나이와 그들의 나이가 자꾸만 멀어지면서 그때의 기억과 감정은 차츰 희미해졌다. 대신 새로운 생각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젊어도 너무 젊었다. 아니 젊다기보다는 어리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비슷한 연배일 때는 몰랐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들이 미처 살지 못한 시간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나이가 어리다고 세상을 모르는 게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더 많이 알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반드시 오래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조금씩 잊고, 그다지 잘 살지도 못하는 시간들을 비루하게 살아가는 현실이 매년 봄이 되면 견딜 수 없게 미안해졌다. 결국 이런 세상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먼저 가버린 이들의 영원히 젊은 얼굴 앞에서 참담하고 부끄러웠다.

당시 거리에서 외쳤던 요구들을 실현하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끝나버린 투쟁은 변변한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4년 먼저 벌어졌던 1987년 6월 항쟁은 하나의 세대를 출현시키고, 집권세력을 바꾸었으며, 천만이 보는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1991년의 봄은 겨우 몇 권의 책과 다큐멘터리로 남았다. 그 때 거리에서 싸웠던 이들은 이름을 얻지 못했고, 그 시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도 없었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이야기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억도 확장되지 못했다. 기억을 확장시킬 수 있는 사건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것도 권력이 될 수 있으며, 그러지 못하는 사건은 기억하는 이들에게 오래오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5·18 이후의 시간을 침묵하며 견뎌야 했던 당사자들이나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는 이들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하지만 기억이 상처가 되고 죄책감이 되고 부채가 되는 경험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96년 여름의 연세대학교

1996년 여름의 기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 여름 나는 연세대학교에 있었다. 범민족대회 때문이었다. 통일운동 진영에서 8·15 즈음 진행하는 범민족대회는 평화롭게 열렸던 적도 있었지만,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열린 적도 많았다. 1996년 범민족대회 역시 원천봉쇄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연세대학교에 들어간 뒤 나는 사수대가 되었다. 본대오가 집회를 하는 동안 사수대들은 번갈아가며 학교 곳곳을 지키면서, 계속 학교 안으로 들어오려는 전투경찰과 맞서 싸워야 했다. 건물 안에서 자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사수대는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자야 했다. 샤워는커녕 속옷조차 갈아입을 수 없었다.

범민족대회는 한총련의 역량을 총결집하는 행사라 학교 안에는 전국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대개 원천봉쇄를 하면 학생들의 출입만 통제하는데, 경찰은 끊임없이 진입작전을 펼쳤다. 머리 위로 시도 때도 없이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날아다녔다. 대학시절 꽤 많은 집회에 참여했지만 헬리콥터가 동시에 여러 대 날아다닌 집회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범민족대회 행사가 끝나가는데도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행사가 끝나면 서로 타협해서 퇴로를 열어줄 줄 알았는데,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고 학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무사귀가를 요구하는 한총련에 대해 정부는 초강경 사법처리 방침으로 맞섰다.

그리고 8월 17일이었을까. 이러다 전부다 잡혀가는 건 아닌지. 그렇게 되면 나이가 많은데다 사수대인 나는 구속되는 건 아닌지 걱정과 두려움과 분노와 피곤이 뒤죽박죽되어 있던 아침, 전투경찰이 쉬지 않고 밀고 들어왔다. 학생식당에서 따뜻한 아침을 먹고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경찰이 갑자기 밀고 들어오면서 종합관 건물에 갇히고 말았다. 사수대는 우왕좌왕 하다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순간 헬리콥터가 옥상 가까이 내려왔다. 헬리콥터가 다가오자 옥상의 모든 것이 떠올랐다. 신문지가 떠오르고 스티로폼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공중부양이었다. 헬리콥터 소리 때문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헬리콥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햇살 쨍쨍한 여름이었다. 현실 속에 있는데 현실 같지 않았다. 꿈이라면 빨리 깨고 싶었다. 깨어나면 내 방 이불 속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사수대들은 다시 건물 로비로 내려와 줄을 맞춰 앉았다. 누군가 건물 바깥에 쌓아둔 나무 책걸상에 불을 질러 엄청난 열기가 밀려들어왔다. 불에 타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찌어찌 해서 연세대학교를 빠져 나왔다. 운이 좋았다. 종합관 강의실로 올라가 학교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아는 간부가 누구든 나가서 밖의 동태를 보고 오지 않겠냐고 했다. 겁이 없는 편이 아니었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후배 한 명을 끌고 나갔다. 종합관 뒤는 야산이었다. 그 곳에서 한동안 다른 사수대들과 함께 전경들과 싸웠다. 그러다 전경들에게 밀리면서 우연히 야산 옆 담을 넘었다. 그 곳에는 학교와 학교 밖 주택가 사이의 빈 공간이 있었다. 거기엔 나처럼 싸우다 담을 넘은 사수대 이 십 여명쯤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하룻밤을 죽은 듯 숨어 버틴 후에 겨우겨우 빠져나왔다. 그 공간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잡혀갔을 텐데 천우신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날 밤 건물을 포위한 전경들은 밤새 노래를 불러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들킬까봐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갇혀버린 학우들을 구하러 가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학교 밖으로 나왔더니 그새 우리는 뉴스 1면을 도배하는 폭도가 되어 있었다. 연희동 주민들은 거지꼴로 조심조심 연세대 뒷산을 빠져나가는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는데 학교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며칠 뒤 연세대학교에 갇혀 있던 다른 학생들이 끌려나오는 모습을 TV로 지켜보아야 했다. 그게 나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학생 활동가들이 구속되었고, 학생운동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총련은 그 후로도 줄기차게 싸웠고, 누군가는 연세대 항쟁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했고 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연세대학교 종합관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 버렸다. 내 마음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한동안 신촌에 가는 일도, 연세대학교를 걷는 일도 모두 쉽지 않았다. 1991년 5월보다 1996년 여름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더 드물었다. 물론 항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혀 공감할 수 없었고 자꾸 화가 났다. 그해 여름은 술자리 무용담으로도 꺼낼 수 없었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1996년 여름의 연세대학교를 말하지 않았다. 그 해 여름은 연세대학교 안팎에 있었던 수 만 명의 학생들에게 무덤처럼 묻혀버렸다. 단 며칠 동안 벌어진 일이지만 사건의 그림자는 길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수 없고 다시 말하고 싶지 않은 사건은 완전히 봉인되어 버렸다. 그 사이 24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면 시간은 언제나 빨랐고 기억은 모래성처럼 부서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 이따금 서울 연세대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그리고 연세대학교 건물 사이를 걸을 때면 그 때의 내가 나의 어깨를 두드리곤 했다. 의도적으로 떠올리는 것인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학교의 풍경이 달라지고, 내가 달라지고, 동행한 사람도 달라졌지만 함께 말하지 못하고 함께 불러내지 못하는 기억은 유령처럼 예고 없이 나타났다. 그 기억 때문에 못 살 정도는 아니었다. 그 곳을 지나지 않거나 8·15 즈음이 아니면 아무렇지 않았다. 이것이 트라우마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억하고 생각 하면 번번이 마음이 쓰리고 힘들었다. 억울했고 아팠고 화가 났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내 마음이 어떤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이들은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억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 과정이 생략되어 버린 사건은 캄캄한 어둠, 혹은 뿌연 안개 속의 미궁처럼 멈춰버렸다. 한 번 사로잡히면 한동안 헤어 나올 수 없었지만, 그 때 그 곳에 있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설명하기 불가능했다. 그저 혼자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억과 공동체

생각해보면 이런 기억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었다. 이런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기억이건, 해방 전후의 기억이건, 한국전쟁의 기억이건 요동치는 한국 현대사는 불시에 사람들을 급습했으니까. 알고 당하기도 했고 모르고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요동치는 역사 앞에서 사람들은 불가항력처럼 어떤 기억들을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오래도록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일상이 무너지는 세월이 너무 길었다. 국가가 나서서 막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오래도록 스스로 입을 닫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잡혀갈까 걱정하실 정도다.

세상이 좋아진다는 것은 기억을 두려움 없이 꺼낼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이 말을 하면 잡혀가지 않을까, 피해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그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는 일이고, 그 기억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눈물을 닦을 수 있게 해주고 등을 두드리며 다독여주는 일이다. 한국전쟁처럼 거대한 사건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강렬한 무늬를 남긴 일들을 이야기 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하는 사회, 누군가 사과하거나 책임져야 한다면 미안하다 말하고 책임지는 사회여야 같이 사는 사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공동체였다.

내가 1991년 봄과 1996년 여름을 잊지 못하지만 말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누군가는 다른 사건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종군 위안부의 기억일 수도 있고, 한국전쟁 양민학살의 기억일 수도 있다. 이제야 용기를 내 이야기 하고 재판을 청구하는 간첩조작사건이나 강제수용소의 기억도 많지 않나. 물론 내가 다른 사건의 경험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들의 기억에 완전히 다가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내가 경험한 어떤 사건들은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기억에 대해,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슬프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에 공감하게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옷깃을 여미게 한다. 덕분에 한 사람을 이해하고 역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들과 내가 함께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기억 사이에 불씨처럼 남은 다른 사건들의 개별적 기억들은 누구도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려준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역사가 정면으로 관통할 수 있다고 일러준다. 의지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우연일 수 있다고, 그것이 역사라고 말해준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쳐준다.

개인에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된다. 기억을 나누고 기억으로 연대할 때, 우리는 잠시 공동체가 된다. 공동체를 만든다. 기억의 공동체가 많은 사회, 그 공동체가 다른 이들에게도 열려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역사는 때로 나에게도 상처를 남겼지만 그 상처 덕분에 다른 이들의 상처와 눈물 자국이 잘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 기억을 말하면서도 눈은 다른 이들의 상처와 눈물 자국을 향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이들이 말할 때 잠시라도 걸음을 멈췄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질문하고 함께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모르겠고 아직도 모르겠는 일들이 너무 많지만, 말하고 듣다보면 버틸 수 있고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서정민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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